[TV서울=이천용 기자] "솔직히 그때는 일하느라 바빠서 무서운 줄도 몰랐어요. 근데 점점 지나고 보니 '진짜 무서운 순간이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국회사무처 방송국(국회방송) 소속 직원 A씨가 1년 전 12·3 비상계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뒤늦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느닷없는 한밤의 비상계엄이 6시간 만에 막을 내린 배경에는 계엄군을 최전선에서 막아내고 침착하게 제자리를 지켰던 국회 직원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국회방송 직원 B씨는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두고 국회로 향해야 했다. 호남 출신으로 1980년 광주를 경험했던 B씨의 부모는 아내에게 연신 전화를 걸어 "못 나가게 막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B씨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가족들을 누나가 사는 수원으로 보낼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여의도로 왔다.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경찰들이 시민들의 꾸중에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B씨는 잠깐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담을 넘으려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어디를 가느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막는 경찰을 향해 시민들이 달려든 덕에 겨우 국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의회경호기획관실 소속 C씨는 일찍 잠이 들었다가 "계엄이 터졌다는데 괜찮은 것이냐"는 장모의 전화를 받고 깨어났다.
C씨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니까 처음에는 장모님이 가짜뉴스에 속으셨다고 생각했다"며 "휴대전화를 켜자마자 난리가 난 것을 보고 지체 없이 국회로 달려와 경호 준비를 했다"고 전했다.
겨우 국회 경내로 들어온 직원들이 맞닥뜨린 것은 총을 들고 있는 계엄군이었다. 의원들이 계엄 해제 요구안에 표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본회의장 밖 로텐더홀에서도 헬기의 굉음이 귓가를 때렸다.
"헬기에서 내린 계엄군이 국회 본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본회의장에 의원님들 외에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해주십시오." 경호 직원들의 무전기가 쉴 새 없이 울렸다.
C씨는 "눈앞에서 무장한 계엄군의 총을 보면 사람이 얼어버릴 수밖에 없다"며 "특히 출입구에서 얼쩡거리는 계엄군을 본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라고 몸서리를 쳤다.
두려움을 억누른 것은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이었다.
B씨는 "그저 '내 일이니까 해야 한다'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튀어나왔다"며 "일을 마치고 나서야 '만약 잘못되면 다 체포돼서 큰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슬슬 무서워졌다"고 말했다.
경찰에 가로막혀 국회 본청에 들어오지 못한 직원들도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이어갔다.
국회방송 촬영팀이었던 D씨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긴급 담화 등을 생중계하기 위해 현장에 있던 직원들에게 휴대전화로 촬영을 요청하며 "정신없이 움직였다"고 웃어 보였다.
12월 4일 1시 1분께 마침내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됐다. 계엄 선포 2시간 30분 만이었다.
"의사봉을 칠 때마다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바라본다"는 고(故)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말이 떠올랐던 것일까. 의사봉을 두 차례 친 우 의장이 잠시 쉬더니 마지막으로 두드리자 B씨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B씨는 "이제 큰 문제는 없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며 "그제야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수원까지 안 가도 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공모자들은 법의 심판대에 섰으며 정권도 교체됐다.
B씨는 "옛날에는 택시에서 '국회에서 일하는 사람을 태우고 싶지 않다'고 승차 거부를 당할 정도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며 "이제는 시민들이 국회를 '최후의 보루'라고 인식하고 존중해주시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있다.
의회경호기획관실 E씨는 "지난 1년 동안 국회는 계속 '계엄'이었다. 직원들의 업무가 계엄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계엄 1주년 행사에 동원되는 직원들을 바라보면서 계엄을 막아낸 사람들의 희생이 계속 이어지는구나 싶어 씁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