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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TV서울] 기고 - 세상의 모든 처음

  • 등록 2018.10.11 16:45:44

[기고] 세상의 모든 처음


“내게 천사를 보여주오,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소.”

 

19세기 중엽 파리에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이 작품으로 사실주의의 시작을 알렸을 때 평단이나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거칠었다. 


전시회장 한 벽면을 꽉 채운 <오르낭의 매장>에 대해 “농부의 죽음에 이렇게 많은 양의 물감을 써야 했느냐”는 비난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더럽고 괴상한 것을 최악의 추악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매도가 뒤를 이었다. 신화 속의 인물도 아니고 고대의 영웅도 아닌 평범한 시골 농부들을 이렇게 거대한 화폭에 담담히 담아낸 화가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평단과 관객의 격렬한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주의의 선구자였던 쿠르베는 당시의 지배적인 화풍이던 신고전주의에 반기를 들어, 존재하지도 않은 고대 신화 속 이상이나 교훈 대신에 시골 농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 중 하나를 과감히 큰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쿠르베의 작품 <오르낭의 매장>은 그래서 종종 당시 살롱 화가를 대표하는 마네의 스승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1815~1879)의 작품 〈쇠퇴기의 로마인들〉과 비교된다. 이 그림은 쿠르베의 작품과 달리 주인공들의 몸매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처럼 지극히 이상화된 매우 균형 잡힌 몸매를 보여준다. 또한 고대 로마풍의 건축물과 조각상을 배경으로 향락에 빠진 로마인들의 모습을 그려 후대인들에게 결국 로마 몰락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라는 큰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쿠튀르의 작품은 당시 주류 화풍이던 아카데믹한 역사 화풍의 진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쿠르베의 그림 속에는 영웅적인 주인공도, 역사적 교훈도 사라지고 단지 소소한 시골 마을 장례식의 슬픔만 남아있다.


러빙 부부의 <러빙 이야기>


<러빙>이라는 제프 니콜스 감독의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미국 인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러빙 대 버지니아주 사건과 그 당사자인 러빙 부부의 사랑을 소재로 다룬 영화다. 


1958년 아프리카계 흑인 혼혈 여성이던 밀드레드 지터는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던 백인 남자 리처드 러빙과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결혼했다. 러빙 부부는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 간의 결혼이 버지니아 주에서 법률 위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이웃 주민의 신고로 러빙 부부는 체포돼 법률을 위반한 동거라는 죄목으로 기소되 었다. 그들은 징역 1년을 선고 받았으나, 버지니아 주에 25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의 집행유예로 겨우 풀려났다.


 

1958년 당시 버지니아주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주에서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의 결혼은 이해하기 어려운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고 처음 보는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집행유예로 겨우 풀려난 러빙 부부는 워싱턴 D.C.로 이사했다가 1964년에 다시 고향을 방문했을 때 함께 여행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그러자 러빙 부부는 변호사의 변호를 받아 대법원에 항소했고, 1967년 대법원은 드디어 만장일치로 러빙 부부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우리의 헌법 하에, 다른 인종인 사람과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는 개인에게 있으며 주가 제한할 수 없다” (얼 워렌 수석재판관의 판결)

 

이제야 처음으로 미국 모든 주에서 백인과 흑인 간의 결혼이 완전히 합법화된 것이다. 1967년 미국 대법원의 러빙 대 버지니아주 판결로 버지니아주를 비롯한 미국 16주에서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한 법안들이 파기되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피부색에 따른 차별과 이에 대한 러빙 부부의 저항과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6월 12일을 <러빙 데이>로 기념하여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다. 그렇게 '낯설고 두려운 일'은 당연한 상식이 되었다.

 

우리는 왜 우리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은 왜 처음 보는 일, 새로운 생각과 시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는 것일까?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을 처음 보았던 당대의 파리 시민들이 그랬고, 1958년 버지니아주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흑인 여성 밀드레드 러빙과 백인 남성 리처드 러빙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도 그러했다. 그것은 처음 보는 두렵고 낯선 '충격과 공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불편하고 거북하고 충격적이다. 전에도 그랬듯 지금의 우리에게도 새롭고 낯설고 충격적인 것들, 익숙하지 않고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관념들은 여전히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 아닌 외부의 낯선 존재일 수도 있고, 우리 공동체 내에서 기존에는 자신의 생각과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대상일 수도 있고, 새로운 변화일 수도 있고, 지배적인 관념과 인식과는 다른 새로운 사고, 새로운 관념일 수도 있다.


과거의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두려움과 낯섦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음의 빗장을 걸고 기존의 사고방식에 안주했다면 지금 우리는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해서 인상주의로 이어지는 수 많은 아름다운 그림들과 빛나는 예술작품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며,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만을 만나 사랑을 나눠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처음’을 대할 때 좀 더 열린 마음과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명백한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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