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울=박양지 기자] 정부와 건강보험 당국은 해마다 4월이면 연례행사처럼 직장가입자를 대상으로 건강보험료를 정산해 미처 거두지 못한 보험료를 걷어간다.
하지만 정부는 매년 법적으로 가입자에게 줘야 할 지원금은 제대로 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부가 가입자한테는 건보료 납부의 책임을 엄격하게 물으면서 정작 법으로 정해진 의무는 다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 정산보험료 최근 증가세…2조1천495억원→3조3천254억원→3조7천170억원
건강보험공단과 보건복지부는 매년 4월에 직장가입자 보험료 연말정산을 한다.
건보료 정산은 전년도 보수총액을 기준으로 우선 부과한 그해 보험료와 실제로 받은 보수총액으로 산정한 확정 보험료의 차액을 그다음 해 4월분 보험료에 추가 부과 또는 반환하는 절차를 말한다.
이를 통해 직장인이 전년도 월급 등이 오르거나 호봉승급, 승진으로 소득이 늘었으면 더 걷지 못한 건보료를 추가로 징수하고, 반대로 임금이 깎여 소득이 줄어들었으면 더 많이 거뒀던 건보료를 돌려준다.
정산보험료는 그해 내야 했던 건보료를 다음 연도 4월까지 유예했다가 나중에 내는 것으로 보험료를 일률적으로 올리는 건보료 인상과는 다르다.
소득에 따른 공정하고 정확한 보험료 부과를 위한 것으로 2000년도부터 시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연말정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보료를 정산하다 보니, 추가로 정산보험료를 내야 하는 직장인 처지에서는 마치 보험료가 오른 듯한 인상을 받게 되고, 그렇다 보니 매년 4월이면 '건보료 폭탄' 논란이 벌어지곤 한다.
올해는 작년에 월급 등 보수가 늘어난 1천11만명은 1인당 평균 약 21만원의 건보료를 추가로 내야 하고, 보수가 줄어든 301만명은 1인당 평균 약 10만원의 보험료를 돌려받는다. 보수 변동이 없는 287만명은 별도로 정산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정산보험료는 증가세를 보인다.
직장 건강보험료 연도별 정산현황을 보면, 정산보험료의 경우 2020년분 2조1천495억원, 2021년분 3조3천254억원, 2022년분 3조7천170억원 등으로 늘었다.
정산을 거쳐 추가로 보험료를 더 걷은 만큼 건보 곳간은 더 넉넉해졌지만, 직장인의 호주머니는 가벼워졌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작년까지 2년 연속 건보재정이 흑자를 기록하면서 누적 적립금은 23조8천701억원으로 늘어났다. 이는 급여비 기준 3.4개월분에 해당한다.
[연도별 정산현황](단위: 만명, 억원)
구 분 | 2022년분 | 2021년분 | 2020년분 |
정산액 | 37,170 | 33,254 | 21,495 |
환급액 | 6,046 | 5,488 | 7,392 |
추가납부액 | 43,216 | 38,742 | 28,887 |
정산대상자 | 1,599 | 1,559 | 1,518 |
◇ 정부 지금껏 국가지원 규정 한 번도 지키지 않아
이처럼 건보 가입자한테는 보험료 납부 의무를 부과하면서, 정작 누구보다 법을 지키는 모범을 보여야 할 정부는 가입자에게 줘야 할 국고지원금을 해마다 축소하는 등 매년 법을 어기는 행태를 보여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건강보험법과 건강증진법에 따라 정부는 2007년부터 해당 연도 '건강보험료 예상 수입액의 20%'에 상당하는 금액을 일반회계에서 14%, 담뱃세(담배부담금)로 조성한 건강증진기금에서 6%를 각각 충당해 건강보험에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정부는 관련 법률로 정한 이런 지원 규정을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험료 예상 수입액을 연례적으로 적게 산정하는 방법으로 일방적으로 지원 규모를 줄였다.
이를테면 매년 예산편성 때 건강보험 지원 규모를 추계하면서 보험료 예상 수입액을 산정하는 3가지 핵심 변수인 보험료 인상률과 가입자 증가율, 가입자 소득 증가율 등을 모두 반영하지 않고 보험료 인상률만 반영해 과소 추계하는 식으로 건보료 예상 수입액을 낮게 잡아서 국고지원금을 하향 조정했다.
그동안 보건의료시민단체는 물론 국회 등에서 건보에 대한 국고지원을 정상화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해마다 법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일은 반복됐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시절에 평균 지원 규모는 각각 16.4%와 15.3%, 14% 등으로 오히려 갈수록 떨어졌다.
윤석열 정부도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임기 첫해부터 건보 재정에 대한 법정 국가지원 규정을 지키지 못했다.
2023년도 건보 재정에 대한 국고지원금은 10조9천702억4천700만원으로 건보 국고지원 비율로 따지면 건보료 예상 수입액의 14.4%에 그쳐 '20% 상당 금액' 지원이라는 법정 기준에 못 미쳤다.
건보재정에 대한 국고 지원 규정은 2000년 의약분업 시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약분업에 반발해 집단 휴진에 들어간 의사들을 달래려고 의료수가(의료서비스 제공 대가)를 올리면서 건보 재정이 악화했고, 급기야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자 2007년부터 건보에 대한 국고지원 법률 규정을 만들어 지원을 시작했다.
이 규정은 일몰제(日沒制; 법률이나 각종 규제의 효력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없어지도록 하는 것)로 운영되며 2016년 12월 31일 만료될 예정이었는데, 1년간 한시적으로 연장된 뒤 2022년 12월 31일까지로 다시 5년 더 늦춰졌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여야가 법 개정에 실패하며 더 연장되지 못하고 2022년말 일몰됐지만, 올해 3월 중순 여야가 건보 국고 지원을 2027년 12월 31일까지 5년 더 연장하는 내용의 건강보험법과 건강증진법 개정안에 합의하면서 가까스로 봉합됐다.
국회 입법조사처 문심명 입법조사관은 "건강보험제도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장하는 중요한 사회안전망으로, 노인인구의 급증으로 건보재정 지출이 증가하는 추세를 고려할 때 국고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일몰제를 폐지해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게 재정을 확보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